홈으로 | 독자문의사항 | 사이트맵 | 즐겨찾기추가
로그인 회원가입
후원하기
지난호보기
2017년 5/6월호
2017년 3/4월호
2017년 1/2월호
2016년 11/12월호
2016년 9/10월호
2016년 7/8월호
2016년 5/6월호
2016년 3/4월호
2016년 1/2월호
2015년 11/12월호
2015년 9/10월호
2015년 여름호
2015년 봄호
2014년 겨울호
2014년 가을호
2014년 여름호
2014년 봄호
2013년 겨울호
2013년 가을호
2013년 여름호
2013년 봄호
2012년 겨울호
2012년 가을호
2012년 여름호
2012년 봄호
2011년 겨울호
2011년 가을호
2011년 여름호
2011년 봄호
2010년 겨울호
2010년 가을호
2010년 여름호
2010년 봄호
2009년 겨울호
2009년 가을호
2009년 여름호
2009년 봄호
2008년 가을호
2008년 겨울호
2008년 여름호
2008년 봄호
2007년 겨울호
2007년 가을호
2007년 여름호
2007년 봄호
2006년 겨울호
2006년 가을호
재창간호
2013년 봄호
Facebook  Twitter 인쇄하기확대축소
[일반논문]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류석춘․김광동]

Ⅰ. 머리말

 

‘북에서는 철저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는 논리와 주장이 우리 사회에 정설처럼 만연해 있다. 이승만 정부는 친일세력을 정권의 지지 기반으로 활용했지만, 김일성 정권은 친일파를 철저히 청산했기에 민족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북한에서는 통치구조의 개편과 토지개혁 및 산업국유화라는 경제개혁을 통해 친일파 청산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고 설파한다. 그 대표적 인사가 강정구 교수다.

 

“북한의 친일청산은 일본의 패망이 발표되는 해방공간 시점인 45년 8월부터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해 곧바로 시작되어 46년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마무리 되었다. 이 결과 북한에서는 친일이라는 과거청산 논쟁이 아예 발붙일 틈이 없게 되었다. 남한 역시 해방과 동시에 친일청산의 민중적 욕구가 분출되어 자연발생적인 청산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미 점령군의 개입으로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인 49년도에서야 늑장부린 친일청산이 시작되다가 이번에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해방 60년 환갑이 된 시점에서도 친일청산이 미완의 과제로 남아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구체적 근거를 토대로 하지 않은 선전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 양성기관인 김형직사범대 출신으로 1999년 월남한 탈북 작가 최진이는 북한의 친일청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해방이후 전 국민의 숙원인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 내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가로서의 승패가 달린 관건적 안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떠오르던 많은 정치인사들 중 누구보다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김일성은 이를 자기 권력기반 형성에 완벽하게 이용하였다. 그 대표적 방법이 인구 70 %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에서 일제시기 땅마지기나 가지고 있던 자들을 우선 처벌하는 일이었다. 3천 평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 천오백 평부터는 부농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들은 전부 타고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의 개인적 사정을 알 바 없는 낯선 고장 사람들은 국가가 ‘친일주구’ ‘역적’이란 딱지를 붙여놓은 추방자들을 심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맡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군중 히스테리의 제물로 고스란히 바쳐졌다. 군중의 열기가 고조되면 될수록 김일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급상승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인들을 ‘적대계급’ 증오사상으로 자극시킬 때 그것이 가져올 반사작용의 효과를 알았다.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분배해 준 자신에 대한 숭배열이었다. 김일성이 무상 분배한 땅은 ‘국가’의 이름하에 곧 압수될 정치 미끼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

 

북한의 철저한 친일청산이란 소비에트(soviet)화를 합리화시키고 나아가서 북한을 공산주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가혹한 전체주의 공산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국(남한) 사회에서는 아무런 확인도 없이 ‘북에서는 철저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일부 언론계 인사나 학자들조차도 ‘북한에서 친일청산이 철저히 이루어진 것은 사실 아니냐’는 믿음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북한체제를 미화하는 선전논리를 비판 없이 수용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북한의 친일청산이 실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규명하지 않고, 북한의 정권기관이 편찬한 몇 가지 체제선전저작물에 근거해 북한 당국의 논리를 반복한 결과이다. 이 글은 북한의 친일청산 실태에 관한 기존 연구 성과를 최대한 활용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힘으로써 ‘북한의 철저한 친일청산’이란 신화를 해체하기 위한 글이다. 나아가서 공산주의와의 대결 상황에서 한국(남한)이 수행했던 친일청산이 아쉬운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는 모습이었음도 밝히고자 한다.

 

Ⅱ. 북한의 친일행위 규정과 처벌: 청산기록 없는 친일청산

 

만약 북한에서 친일문제가 철저히 청산되었다면 누가 친일을 어떻게 했고, 그 결과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가 명백히 밝혀졌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북한의 친일파 처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면 그런 사실을 수없이 나열하며 자랑했을 북한이나 친북인사들은 왜 이 대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가? 북한에서 누가 어떤 친일행위로 인해 어떤 처벌을 받았냐는 질문에 이들은 그저 ‘많았고, 철저했다’는 식의 대답만 할 뿐이다. 심지어 북한의 대표적 체제선전 역사서인 『조선통사』(1958), 『조선전사』(1981), 혹은 『현대조선역사』(1983)조차도 단 한 명의 구체적 실명을 들며 누가 어떤 친일행위를 했고,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해방 후 평양으로 들어 온 소련과 김일성 세력은 한편으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척결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진영과의 단합을 역설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해방 직후 북한 각지에서는 인민들의 손으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처벌받고 있었지만, 소련군정과 북한의 좌익진영은 통일전선 다시 말해 좌우합작을 중시하여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 문제를 가급적 격화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가 채택한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서’는 일제 관공리에 임명된 이들을 ‘반역지주’로 규정하고 이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으나, 동시에 그것이 본의가 아니라는 인근 주민이나 소작인의 증명이 있을 때에는 ‘반역지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이중적 잣대를 보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를 통해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이 언사는 건국 과정에 ‘유산계층’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서 공산측이 통일전선의 범위를 확대할 때 구사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문제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은 남북한의 정치정세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파가 하루아침에 찬탁(친소)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반탁(반소) 입장의 우파와 격렬히 대립하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좌우합작 노선이 우익타도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소련군정은 모스크바의 신탁통치 결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조만식을 비롯한 조선민주당 지도부를 ‘모스크바 결정의 의의를 왜곡하는 친일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숙청할 것을 지시했다. 1946년 1월부터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반역반동분자로 탄압받거나 숙청되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지도부가 친일파 처리에 대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마련한 것은 1946년 2월 8일 중앙권력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임위)가 수립된 직후였다. 북임위는 스스로의 사명을 “친미친일파, 민족반역자, 지주, 예속자본가들에게 독재를 실시하고 인민대중에게는 민주주의를 실시하면서 북반부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여 혁명적 ‘민주기지’를 창설하여 점차 사회주의혁명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천명한 사실상의 북한 정부이다. 1946년 3월 7일 북임위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채택하였다(부록 1 참조). 이 규정은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강화시키는 ‘민주기지론’ 방침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채택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친일파의 범주에는 일제에 복무한 고급관리는 물론이고 경찰 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의 관리와 밀정 등이 포함된다. 또한 하위관리라 하더라도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인사들이나 민간인 역시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규정에 의한 북한의 친일청산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원칙과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의 ‘반동행위’도 친일과 같은 민족반역으로 규정하고 있고, 나아가서 청산을 위한 법적 절차 특히 처벌을 위한 사법적 절차를 전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 공산정권은 친일파와 반동분자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즉 ‘친일 민족반역자 및 반동분자’를 함께 처벌하였는데, 형법 조문도 없이 ‘기본원칙’ 20조에 의거 사형까지 언도했다. 기본원칙 20조는 “형사재판은 ‘조선인민의 이익과 민주주의적 의식’에 따라 범죄자들을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반대세력을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숙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조선인민의 이익과 민주주의적 의식”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공산주의와 공산당 권력에 반대하는 요소라고 심증이 가는 것이라면 증거 유무에 관계없이 무조건 범죄자로 처벌할 수 있는 절대적’ 독재행위를 말한다. 또한 “공개재판에 의해 민중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은 아예 비공개 문서재판에 의해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붙들려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본원칙 20조는 북한에서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의 악법으로, 북한 당국은 이 악법을 공개문헌 어느 것에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기관들은 계속해서 아무런 법률적 근거도 없이 주민들에게 민족반역자와 반동분자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소련과 김일성 세력의 ‘친일 민족반역자 및 반동분자’ 처리목적은 친일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공산독재혁명을 추진하는데 찬성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결국에는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자를 처벌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자의적인 친일파 규정과 처벌의 이면에는 김일성이 초기부터 견지했던 친일파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1946년 3월 7일 북임위가 채택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의 부칙 조항 역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은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고 함으로써 친일규정의 적용에 있어서 탄력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친일세력으로서는 과거에 대한 속죄가 건국사업에 대한 기여에 따라 운명이 갈라지는 형편이 되었고, 결국 생존을 위해서는 모두 친공(親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북한에서는 친일청산에 대한 체계적인 법령은 물론 청산에 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와 사실관계도 없이 ‘철저한 친일청산’이 있었다는 선전이나 주장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는 친일청산에 관한 독립적인 법률도 없고, 전담하는 국가기구도 없었으며, 그 어떤 정식 재판도 없었다. 있었다면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 재산 있는 사람으로부터 재산을 뺏는 과정에 갖다 붙인 ‘친일’이라는 딱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자의적인 인민재판이 있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친일청산에 대한 유일한 법령인 1946년 3월 7일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은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규정일 뿐만 아니라 처리절차가 뒷받침되지 않은 선언적 문구로만 가득 차 있는 전시용이었다. 그 자체가 선전용이고 그 목적도 공산 소비에트 체제로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북한에서 발간된 자료 중에서 유일하게 처벌된 인물을 실명에 가깝게 거론한 경우가 1946년 김일성이 하달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의 집행 결과에 대한 『조선전사』(1981)의 기록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남신의주 동양상공회사에 예속되었던 300여명의 로동자들은 성토모임을 열고 이 공장의 경영주였던 리 아무개의 형제를 친일파, 예속자본가로 규정하는 리유서를 만들고 그 놈의 소유를 몰수하였다. 함경남도에서는 악독한 친일주구이며 예속자본가였던 방아무개란 놈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그 놈의 재산을 철저히 몰수하였다”고 한다. 철저했다는 북한의 친일파 처단과 관련된 단 2명조차도 실명 없이 성(姓)만 거명하는데서 그친다. 그것은 북한이 무한히 자랑했어야 할 친일청산 사례가 모두 공산화(soviet) 과정의 ‘재산 빼앗기’였을 뿐임을 웅변하고 있다. 물론 이는 친일에 대한 사실적인 규명 그리고 객관적인 처벌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Ⅲ. 공산전체주의화 과정의 부담제거 수단

 

1. 지주와 농민 간 계급투쟁의 도구

 

북의 친일청산은 무엇보다 농업집단화의 첫째 단계였던 토지개혁의 맥락에서 접근하고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북임위가 계획했던 소위 ‘민주개혁’ 가운데 제일 먼저 시행되었다. 왜냐하면 토지개혁이야말로 식민지 시기부터 누적되어 온 토지소유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이후 북한 지역에서 인민정권을 수립하려는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세력의 물적 토대를 허물고 소작농이 대부분인 북한 전역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결정적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북임위의 김일성 위원장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선포하고 ‘일본국가·일본인 및 일본단체 소유지’ (a) 반역자·일제의 정권기관에 적극 협력한 자의 소유지와 해방 당시 자기지방에서 도주한 자의 소유지, (b) 민족반역자 및 도주자 토지, (c) 5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 토지, (d) 전부 소작 주는 자의 토지, (e) 계속적으로 소작 주는 자의 토지, (f) 성당, 승원 등 종교단체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소유지로 분배하는 토지개혁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에 따라 몰수된 토지를 소유자 및 소유 규모별로 정리한 결과가 <표 1>이다. 

몰수된 토지 100만 325 정보는 북한 총경지면적의 52%에 해당하며 지주가 소유했던 토지의 80% 이상이 몰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 소유권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전제로 한 토지개혁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표 1>에서 주목할 부분은 친일파의 토지 즉 ‘민족반역자 및 도주자’의 몰수된 토지가 13,272 정보에 그치고 있고, 그 비중 또한 1.3% 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농가 수 기준으로도 이들의 비중은 전체 개혁 대상의 0.3% (1,336 호)에 그쳤을 뿐이다. 이런 사실은 북한의 토지개혁이 토지 소유관계의 변화를 통해 공산독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했을 뿐, 일제잔재 청산 다시 말해 식민지 지주제의 해소는 주된 관심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다시 말해 토지개혁은 그 목적 자체가 소유권을 부정하거나 소유관계를 바꾸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몰수대상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의 토지와 재산에 국한되지 않았다. 따라서 민족/반민족의 구분이 실재로는 생산수단 즉 토지소유 여부를 중심으로 한 계급 문제로 전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말하는 ‘민족반역자 청산’이란 곧 ‘자산계급 청산’이었고 그것은 곧 재산의 몰수를 의미했다. 토지개혁을 명분으로 한 개인재산권 부정은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으로, 그들은 ‘반공반소 분자들의 경제적 근거를 완전히 숙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토지개혁을 이용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토지개혁은 반탁세력에 대한 공세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한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북한의 농민들은 ‘무상으로 토지를 취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농민들은 [지주에게서 토지를 유상으로 매입하여 이 토지를 다시 농민에게 유상으로 매매하는 것을 희망했으며,] 이러한 경우에만 자신이 취득한 토지가 실제로 영원히 농민들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북한의 토지개혁은 결국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근로농민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농민만이 토지를 경작할 수 있고 매매나 임대차 및 저당 설정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어서 사실상 토지에 대해 소유권이 없고 경작권만 허용된 제도였다. 그 결과 농민들에게는 개인 소유권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이 봉쇄되어, 북한의 토지개혁은 ‘토지국유화’와 동일한 효과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농민의 거주 이전 및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여 사실상 농민을 토지에 결박시킴에 따라 개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선택이 사라지면서 북한은 전체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2. 공산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친일로 규정

 

북한에서 말하는 ‘친일청산’이란 개념은 실제로는 공산주의에 반하는 세력에 대한 숙청을 의미했다. 실제 “북한의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은 순전히 과거의 친일행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소련 군정과 북한의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 및 소련 군정과 북한의 국가권력이 시행하는 다양한 시책에 대한 반대라는 현재의 ‘반동행위’에 대한 처벌과 밀접히 결합되었다. 이 때문에 보안기관과 사법검찰기관에서는 친일행위와 반동행위를 똑같은 정치범죄의 범주로 묶어 파악했고, 이에 대해 광범위한 숙청을 단행했다.” 공산 측에 비협조적이고 반공적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일본과의 적극적인 협조자’라는 이유로 숙청되었다는 소련 자료 및 전술한 『조선전사』에 나타난 친일청산으로 거론된 예를 보면 북의 친일청산이란 결국 공산화 과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북한이 친일청산을 공산화과정의 도구로 활용했던 것은 해방 직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공산체제의 수립이라는 목적과 관련된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무자비한 소련군의 학정이 수많은 반발을 일으켰다. 소련군은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을 일삼았고, 소련 군정은 북한지역의 군수공업·중공업 산업체들이나 공장 등 기간시설과 그 생산물을 전리품으로 생각해 소련으로의 무단 반출을 당연시했다. 소련은 1945년 11월부터 본격적인 공업설비의 철거와 반출을 개시하였다. “수풍발전소의 발전설비를 포함하여 1946년 5월 1일까지 반출해간 목록에는 3460만 엔의 전리품과 신상품이 소련으로 반출됐다. 반출된 제품 중에는 1,500 kg의 금과 5t의 은이 함유된 4261t의 구리와 납 광석, 78t의 페로텅스텐, 1,550 t의 형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 당국은 석탄 생산 감소에 따라 조업을 중단한 일부 석탄공업 기업소를 폐쇄하고, 모든 고가 장비를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할 것을 결정하였다. 흑색금속공업 분야에서는 북한 공업과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연산 18만t 규모의 설비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하였으며 5개의 알루미늄 공장 가운데 4개를 철거 반출하였다.” 그 외 소련군은 “9월부터 11월 사이에 북한 각지에서 건물․쌀․면포․기타 생활필수품 약 40억 원 가량을 가져갔다.” 또한 북한에서 1946년 3월 토지개혁이 시행되기까지 각급 인민위원회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강제적인 농산물 징발정책에 반대한 지주들과 부농들이 친일 반동세력으로 몰려 숙청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결국 소련의 군정 정책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공산주의라는 체제에 대한 상당한 의구심과 거부감을 초래했고, 민족우익 세력의 반소반공 운동과 결합되어 각종 시위나 사건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의거와 1946년 3월의 함흥·흥남 대규모 시위 등이다. 신의주 학생의거의 경우 소련군은 탱크를 동원한 무차별 기관총 난사와 전투기의 기총 소사까지 동원하며 진압했다. 이런 사건 이후 공산당은 소련군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뒤지면서 민족주의 인사를 구속하는 한편 인민재판을 행하여 수많은 사람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냈다. 이러한 소련 중심적 소비에트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명분으로 활용된 것이 바로 친일반역자 혹은 반동분자에 대한 숙청이었다.

소련 군정은 “북한 주민들의 반소 정서를 무마하고 북한에서 소련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공업정책을 수정하여 일제의 산업기관들을 북조선 인민정권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 8월 1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국가와 일본인의 개인 및 법인 등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의 반역자 소유로 되어 있는 일체의 기업,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상업 및 문화기관, 은행 등을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유화했다.” 그러나 이에 맞선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역시나 반동, 친일, 민족반역자라고 규정하고 탄압, 숙청하였다. 각종 건물, 재산, 공장 등을 친일파·민족반역자란 명분으로 빼앗았던 것은 결코 ‘친일행위에 대한 처벌’이란 의미의 친일청산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소련군의 학정(虐政)에 대한 저항을 진압하고 공산화를 추진하는 과정의 방편으로 선택되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 1946년 북한 각지에서는 농민반항, 학생저항, 청년 단체들의 반소․반공 무장항쟁이 광범하게 나타나게 되었고, 1948년 봄에는 천도교의 3․1 재현운동이 반일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개되었다. 이러한 저항민족주의 운동을 북한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낙인을 붙여 탄압하였다. 북한 주민의 다수가 남한으로 탈출하는 민족의 대이동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진행된 일이다. 결국 북한의 친일청산은 곧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고 소련 제국주의 국가를 완성해 사회주의 독재를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역 시·군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최소한의 사법적 절차도 없이 소련 군정 및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협조 여부나 이해관계에 따라 자행되었다. 당시 공산세력이 장악한 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과 위상을 세우고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던 것이다. 특히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한 1947년부터는 소련 군정과 인민위원회에 협조하지 않거나 스탈린 우상화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 군중대회에서 처벌하는 일이 허다했다.

반면 일제시대의 밀정이나 악질 친일파라도 공산당에 협조하면 그들의 과거 행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북한 정권은 친일 민족반역이나 친미 민족반역이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스탈린 팽창주의 시대의 북한지역에 단 한 사람의 친일 친미분자도 남겨두지 않고 소탕하겠다는 정책은 요컨대 북한 땅에 공산주의 이외의 세력은 아예 근절하겠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족민주주의 세력의 기반이 되는 지주 자본가들을 민족반역자로 규정하여 숙청하고, 또한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민족 인텔리들을 친미 민족반역자로 규정하여 숙청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결국 북한을 민중민족민주주의 기지국가로 건설하는 기초 작업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그리고 반동분자는 한 묶음으로 규정되어 혁명적으로 처벌되었다. 법적 근거와 절차를 두지 않았던 인민재판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3. 민족세력을 ‘친일반역자’로 숙청한 친일청산

 

점령 초기 북한에 독자적인 정치·조직 기반을 갖는 정당 사회단체를 창설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소련군 지도자들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조직화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였다. 민족주의자가 각급 자치기관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배제하고 북한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들을 연소용공(聯蘇容共)의 방향에서 순치하기 위해 이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신탁통치 결정이 나온 이후 소련군정은 좌익 지원을 노골화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타도를 본격화하였다. “조선임시정부수립과 신탁통치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조만식의 완강한 반대는 임시정부수립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자 했던 소련지도부를 자극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 지도부는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조만식의 강제적 퇴장으로 이어졌다.” 1946년 1월 5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조만식이 위원장직을 사임하자 이 날로 조만식을 연금시켰다.

이후, 소군정은 조선민주당 지도부가 “모스크바 결정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조선민주당 지도부를 ‘모스크바 결정의 의의를 왜곡하는 친일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숙청할 것을 지시했다. 민족주의 세력인 조선민주당과의 합작을 포기하고 이를 타도하는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북한에서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은 찬탁․반탁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만식 등 우익 민족주의 세력과 반탁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투쟁과 결합되었다.”

특히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논리로 등장한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운동은 미소공동위원회 시기 한층 격화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반탁진영의 모든 집단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북조선 분국은 이승만 박사를 나라의 이권을 팔아먹은 파렴치범으로,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살인 방화 매국’의 화신으로 단죄하였다. 조만식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려 여론재판을 받았다. 조만식에 대한 비난은 그가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전쟁범죄자라고 주장함으로써 극에 달했다.” 또한 “신탁통치에 반대한 북한의 개신교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선동하고 학도지원병 모집에 협력한 ‘왜놈들의 앞잡이’로 성토되었다.” 그렇기에 북한에서는 친일청산이 철저했던 것이 아니라 민족지도자에 대한 숙청이 철저했다고 해야 정확하다. 친일청산은 명분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청산이란 곧 공산화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친일파와 해방 후의 민족반역자를 한 묶음으로 다루었고, 해방 후의 민족반역자란 두 말할 것도 없이 공산당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Ⅳ. 공산화에 협조하면 친일이 용납된 친일청산

 

북한은 친일파 처벌문제를 단지 공산혁명 투쟁의 도구로 삼았기에 친일파라도 공산 소비에트화에 동참하면 잘못을 덮고 책임을 묻지 않았다. 친일청산의 기준은 공산화와 소련 식민체제의 구축에 협조하느냐의 여부였다. 따라서 해방 직후 기술 간부나 교사요원을 비롯한 엘리트들의 경우는 일제시기의 행위나 복무 문제를 삼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재임용했다. 일제에 복무한 사실이 있더라도 필요한 능력이 있거나 정권에 적극 협력할 경우 등용했던 것이다. 김광운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각 방면에서 정치기구 확대는 간부 충원을 필수적으로 동반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문직과 기술직의 경우 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여 구체제 인물의 잔류를 허용하였다. 몇 번의 당원 검열을 통한 출당조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 7월 현재 황해도 내 당 간부의 70 %가 일제의 기관이나 기업소에 복무한 경력자였다. 당 조직이 이러했다면 기타 정치기구에서는 그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들을 간부로 충원하지 않고서는 광범한 대중의 정치활동을 보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임시인위는 정치선전과 관계없이 전문성을 갖춘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해서 관대한 규정을 내렸고, 그들을 계속 간부로 충원하였다.”

 

해방 후 북한이 당면했던 심각한 전문기술인력의 부족상황은 1946년 8월부터 10월까지 북한을 방문했던 소련인 저널리스트 기토비치와 부르소프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사업국 국장인 이문환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에 의하면, “조선의 산업체에 총 20,800명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인 전문가들이었다. (…) 북한의 산업체에서만 16,000명의 전문가를 필요로 하고 있으나 현재 북한에는 547명만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외에 950명의 일본인 기사와 기술자들이 북한에 남아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친일파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들도 활용하였다. 해방 후 북한은 거대한 공장을 자체적으로 가동하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 기술자들의 귀국마저 중지시키고 강제로 일을 하게 했다. 그리고 북한 기술자들로 하여금 기술 이전을 받도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868명이나 되었고 1947년에는 405명이 되었다. (…)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김일성)이 4,000원, 동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 일반 사무원이 800~1,00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좋은 대우를 해 주었는지 (…) 흥남공장에서는 일본인 기술자 콘키치(昆吉朗)를 ‘노력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최초의 인민위원 선거와 관련하여 김일성은 ‘전 당원들에게 ‘진정으로 능력 있는 인물이 당선되도록 최대의 노력을 다할 것’을 주문하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규정에 있어서 일체 기계적이며 공식적으로 되는 해석을 피해야 할 것이며, 8․15이후 건국사업에 적극 노력하며 개과천선하고 나온 자들에 대하여 관대한 처리를 할 것’에 특별한 주의를 돌리라고 강조하였다.” 북한의 대표적 역사서 『조선전사』 현대편 (23편) 「민주건설사 1」은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당시 과학자, 기술자, 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기관과 중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 문화, 보건 기관들의 중요 부서에서 일하도록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공산화에 적극 동조하면 친일전력이 문제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보도에서는 “북한이 친일파 척결에 나서서 거대한 성과를 세웠지만, 남한은 이들을 고관으로 등용하여 이들과 야합하고 있다”고 사실과 달리 선전하였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북한의 이중성은 물론, 선전선동에 의한 체제 건설 및 유지가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친일파에 대한 관용과 활용은 정권초기부터 시행되었다. 김일성과 소련군 지도부는 권력 기관 내에 친일 혐의가 있는 인사들을 등용하는데 별다른 주저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북한의 초기 내각 명단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부록 3 참조). 대표적 경우가 일제시대 도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는 강량욱이 1946년 2월 출범한 북임위의 서기장을 역임한 사실이다. 또한 1943년 4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광산을 경영하며 일제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정준택이 전문성을 인정받아 해방 후 북한 최초의 중앙행정기관인 행정10국에서 산업국장으로 임명된 사실이다. 그는 북한 정부의 공식적인 수립 이후에도 계속해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북한 경제의 총사령탑에 앉았다. 그가 1973년 1월 부총리 재직 중에 사망하였을 때 그의 장례식은 김일성의 눈물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에게는 최고 영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나아가서,

 

일제 말 함흥 철도국장을 지낸 바 있는 한희진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교통국장에 임명되었다. 친일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의학박사 출신의 윤기녕이 보건국장에, 치과의사 출신의 한동찬은 상업국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또한 지주 출신으로 산업경제가이자 전기산업 원가 이론가로 명성이 있는 리문환도 행정10국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산업국장을 맡았다. 비록 한희진은 문책성 인사로 1946년 8월에 해임되었고, 9월에는 한동찬이 불만을 품고 진남포항을 통해 북한을 이탈하였지만, 전문 인력에 대한 우대 정책은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문인 우대 정책은 교육기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일제시기에 복무한 교원들은 일정한 재교육을 거쳐 다시금 교육 현장에 복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북한에서는 특히 친일경력을 가지고 공산화와 소비에트화에 적극 앞장서 정권의 핵심부까지 진출한 인물이 많다. 김일성 자신부터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던 미국과 협조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립우호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군으로 숨어들어간 사실이 있으니 친일은 물론이고 소비에트화에 협조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배경으로 권력 핵심을 장악했던 인물로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金英柱)를 들 수 있다.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그는 1960년대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행세해 왔다. 만주에서 검사장을 하던 한낙규는 검찰총장을 했고, 일본 제국군대의 파일럿 출신인 이활은 1961년 인민군 공군사령관에 오르기도 했다.

Ⅴ. 한국(남한)에서의 친일청산

 

북한과 비교해 볼 때, 대한민국에서는 합법적인 기준과 절차를 가지고 제도적인 기준을 마련하며 친일청산을 시도했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건국 주도세력은 친일파를 배제하여야 한다는 당위를 다양한 조치에 따라 전개하였다. 먼저, 대한민국은 건국을 위한 5·10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친일부역자들의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법 제2조는 ①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②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 등은 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또한 선거법 제3조는 ① 일제시대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및 헌병보 또는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및 그 밀정행위를 한 자, ② 일제시대 중추원의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가 되었던 자, ③ 일제시대에 부 또는 도의 자문 혹은 의결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 ④ 일제시대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던 자 또는 훈 7등 이상을 받은 자 등은 피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단 기술관 및 교육자는 제외).

대한민국이 이처럼 친일파 배제원칙을 준수하면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이나 국회 간부에는 친일파로 규정될 수 있는 인사가 단 한 명도 참여할 수 없었다 (부록 3 참조). 따라서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친일청산에 보다 적극적이고 철저했으며 또한 합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친일청산에 대한 합법적 기준과 절차를 세우고자 했던 의지는 이후 이어진 현대사의 여러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미군정의 인준 거부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1947년 7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채택된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나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채택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반민법)이 바로 그것들이다 (부록 2 참조). 그리고 실제 남한에서는 1948년 반민법에 의거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1949년 8월 말까지 약 1년 동안 682건의 반민족 행위 사건을 사법적 절차에 따라 소추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영장발부 408건, 기소 221건, 재판종결 38건, 처벌 12건의 사법적 소추가 있었다.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파 정리 작업이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남한)의 친일청산이 한계를 보여 준 것을 사실이지만, 이는 어찌 보면 당시의 정치와 안보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시 스탈린과 슈티코프의 지시를 받은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위해서 대구 폭동,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등 폭력노선으로 정부수립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당장의 치안유지와 자유민주체제의 수호를 위하여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과 행정요원이더라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미군정 보고서가 “모든 가능성을 타진한다 하더라도 일제하 많은 수의 공무원들은 친일 또는 반일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 없이 일했다. (…) 그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하는 총괄적인 대가를 치르는 것은 그들 대부분에게 공정치 못하다”라고 쓰고 있듯이, 일제기관 복무자를 모두 친일파로 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하급관리보다는 정치적 비중이 높은 자리에 친일인사가 중용되는 문제를 배제하는 일이 정치 지도자의 바람직한 선택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의 적화를 막고 남한을 기반으로 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과 갈등하면서까지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위층에서는 친일파를 철저히 배제했다. 다만 일선의 하급 관료나 경찰에 대해서는 나라의 존립을 위해 일제 기관에서의 복무 여부를 따지지 않고 등용했다. 국가의 안보 위협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더라도 한국(남한)은 친일청산을 했던 명확한 근거와 자료가 있다. 그럼에도 친일청산에 대한 근거와 사실이 없는 공산 혁명을 한 북한이 철저한 친일청산을 했다고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한국(남한)은 그렇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될 뿐이다.

 

Ⅵ. 맺는말

 

일제 식민체제가 종결되면서 해방 직후 남한과 북한은 모두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형사적 처벌을 민족적 요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 군정과 김일성 정권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공산화 혁명의 도구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공산혁명과 소비에트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에 따라 친일청산을 명분으로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재산권을 박탈하는 방법으로 소련 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체제를 건설할 수 있었다. 결국 공산 전체주의체제의 구축에 친일문제를 수단으로 활용하였을 뿐, 엄밀한 의미의 친일 행위자에 대한 처벌이나 청산작업은 없었던 것이다. 북한이 했다고 선전하는 ‘친일청산’이란 친일청산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반공 혹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과 청산이었을 뿐이다. 공산혁명에 저항적이었던 유산계급의 재산을 대상으로 한 ‘재산 빼앗기’ 과정이었고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만드는데 반대한 세력에 대한,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에 대한 숙청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친일을 했더라도 공산혁명에 협력한 자들은 동참할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친일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친일파 혹은 민족반역자에 대한 숙청은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결코 아니었고, 소련군정과 북한권력에 대해 저항하고 공산 제국주의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소위 ‘반동행위’에 대한 처벌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기에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 선생을 친일·민족반역자로 몰았고, 자주독립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민족반역자라 비난했다. 심지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까지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방화, 살인, 매국노라고 공격했던 것이다. 북한이 ‘철저한 친일청산을 했다’는 거짓 신화는 친일청산과 소련의 위성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있었던 소비에트 공산혁명 과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북한의 선전과 주장에 동조하는 논리일 뿐이다. 북한에서 있었다는 ‘철저한 친일파 청산’이란 있지도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고, 그것은 공산주의자들과 친북좌파들에 의해 철저히 강변된 선전선동 논리에 휘둘리는 결과이기도 하다.

 

<부록 1> 북한의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1946. 3. 7,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다음에 해당되는 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이다.]

 

1. 일제의 침략당시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관계자.

2. 귀족칭호를 받은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

3. 악질고관 (조선총독부 국장 및 사무관, 도지사, 도사무관, 도참여관).

4. 일제경찰 및 헌병 고급관리 (경찰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 사상범 담임판사와 검사.

5. 고등경찰 중 악질분자 (인민의 원한의 대상이 된 자).

6. 고등경찰의 밀정책임자와 밀정.

7. 해내외 민족운동자와 혁명투사들을 학살 또는 박해한 자와 방조한 자.

8. 도회의원 및 친일단체 파쇼단체 (일진회, 일심회, 녹기연맹, 대의당, 방공단체 등) 간부와 악질분자.

9. 군수산업의 책임경영자 및 군수품조달 책임자로 악질분자.

10.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기관과 관계를 가지고 만행을 감행하여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으로 된 민간악질분자.

11.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의 관공리로서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악질분자.

12. 황국신민화운동을 전개하여 지원병, 학도병, 징용을 실시하는데서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한 악질분자.

13. 8.15 해방 후 민주주의적 단체를 파괴하며 또는 그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거나 테러단을 조직하고 그것을 직접 지도한 자와 그와 같은 단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 혹은 테러행위를 직접 감행한 자.

14. 8.15 해방 후 민족반역자들이 조직한 반동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15. 8.15 해방 후 민족통일전선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밀정 혹은 선전원으로서 의식적으로 밀정행위를 감행한자와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선전을 한 자.

 

부칙: 이상의 조항에 대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

 

* 출처: 김일성,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김일성저작집』2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113-114쪽.

 

<부록 2> 한국의 ‘반민족행위처벌법’ [시행 1948. 9.22] [법률 제3호, 1948. 9.22, 제정]

 

제1장. 죄

 

제1조.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

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

제3조. 일본치하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4조. 좌의[다음의]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

 

1. 습작한 자.

2. 중추원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 되었던 자.

3. 칙임관이상의 관리되었던 자.

4.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5.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

6.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7. 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8. 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

9. 관공리 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10.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11.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

12. 개인으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제5조.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이상, 훈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

.

.

제2장. 특별조사위원회

 

제9조 반민족행위를 예비조사하기 위하여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 10인으로써 구성한다. 특별조사위원은 국회의원 중에서 좌기[다음]의 자격을 가진 자를 국회가 선거한다.

 

1.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자.

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

.

.

제3장. 특별재판부 구성과 절차

 

제19조. 본법에 규정된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법원에 특별재판부를 부치한다. 반민족행위를 처단하는 특별재판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재판부 부장 1인, 부장재판관 3인, 재판관 12인으로써 구성한다. 전항의 재판관은 국회의원 중에서 5인, 고등법원 이상의 법관 또는 변호사 중에서 6인, 일반 사회인사 중에서 5인으로 하여야 한다.

제20조. 특별재판부에 특별검찰부를 병치한다. 특별검찰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검찰부 검찰관장 1인, 차장 1인, 검찰관 7인으로써 구성한다.

제21조. 특별재판관과 특별검찰관은 좌[아래]의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선거하여야 한다.

 

1. 독립운동에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법률가.

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

.

.

제28조. 본법에 의한 재판은 단심제로 한다. 소송절차와 형의 집행은 일반형사소송법에 의한다.

 

부칙 <제3호, 1948. 9.22>

 

제29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본법 공포일로부터 기산하여 2년을 경과함으로써 완성된다. 단, 도피한 자나 본법이 사실상 시행되지 못한 지역에 거주하는 자 또는 거주하던 자에 대하여는 그 사유가 소멸된 때로부터 시효가 진행된다.

제30조. 본법의 규정은 한일합병 전후부터 단기 4278년 [서기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행위에 이를 적용한다.

제31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자로서 대한민국 헌법 공포일로부터 이후에 행한 그 재산의 매매, 양도, 증여 기타의 법률행위는 일체 무효로 한다.

제32조. 본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부록 3> 남북한 초대 내각 명단과 친일

 

▲ 대한민국 초대 내각 명단, 1948년 8월 (양동안, 2001: 532).

 

대통령 - 이승만 (李承晩,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 이시영 (李始榮,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무총리 - 이범석 (李範奭, 광복군 참모장)

무임소장관 - 이윤영 (李允榮, 국내항일 기독교 목사)

무임소장관 - 이청천 (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

외무장관 - 장택상 (張澤相, 청구구락부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 윤치영 (尹致映,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투옥)

법무장관 - 이인 (李仁, 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국방장관 - 국무총리 이범석 겸직

재무장관 - 김도연 (金度演, 2.8독립선언 투옥)

농림장관 - 조봉암 (曺奉岩, 공산당 간부)

상공장관 - 임영신 (任永信, 독립운동가/교육가)

문교장관 - 안호상 (安浩相, 항일교육/철학교수)

사회장관 - 전진한 (錢鎭漢, 국내항일/노동운동가)

체신장관 - 윤석구 (尹錫龜, 국내항일/교육·사회운동가, 6.25 중 인민군에게 총살)

교통장관 - 민희식 (閔熙植, 재미항일/철도교통전문가)

총무처장 - 김병연 (국내항일)

기획처장 - 이순탁 (국내항일)

공보처장 - 김동성 (국내항일)

국회의장 - 신익희 (申翼熙, 임시정부 정내무총장)

대법원장 - 김병로 (金炳魯, 항일변호사)

 

▲ 북한(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 명단, 1946. 2. 9 (김광운, 2003: 267)

 

위원장 - 김일성 (일제시대 일본과 중립우호조약을 맺은 소련군 장교)

부위원장 - 김두봉

서기장 - 강량욱 (일제시대 도의원)

보안국장 - 최용건

산업국장 - 리문환 (일제시대 지주출신, 산업경제 전문가)

교통국장 - 한희진 (일제시대 함흥철도국장, 1946년 8월 해임, 후임 허남희)

농림국장 - 리순근

상업국장 - 한동찬 (일제시대 치과의사, 1946년 9월 탈북, 후임 장시우)

체신국장 - 조영렬

재정국장 - 리봉수

교육국장 - 장종식

보건국장 - 윤기녕 (일제시대 의학박사)

사법국장 - 최용달

기획부장 - 정진태 (후임 박성규)

선전부장 - 오기섭 (후임 리청원)

총무부장 - 리주연

기타 위원 - 박정애, 무정, 강영근, 강진건, 방수영, 방우용, 김덕영, 리기영,

홍기황, 현창형

 

▲ 북한(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 명단, 1947. 2. 22 (김광운, 2003: 428)

 

위원장 - 김일성 (일제시대 일본과 중립우호조약을 맺은 소련군 장교)

부위원장 (2명) - 김책, 홍기주

사무장 - 한병옥

기획국장 - 정준택 (일제시대 광산 지배인, 1977년 정무원 부총리)

산업국장 - 장시우

내무국장 - 박일우

외무국장 - 리강국

농림국장 - 리순근

재정국장 - 리봉수

교통국장 - 허남희

체신국장 - 주황섭

상업국장 - 장시우

보건국장 - 리동영

교육국장 - 한설야

노동국장 - 오기섭

사법국장 - 최용달

인민검열국장 - 최창익

총무부장 - 김정주

간부부장 - 장종식

양정부장 - 송태욱

선전부장 -허정숙

 

▲ 북한(북조선) 초대 내각 명단, 1948. 9. 9 (김국후, 2008: 282)

 

수상: 김일성 (일제시대 일본과 중립우호조약을 맺은 소련군 장교)

제1부수상: 박헌영

제2부수상: 홍명희 (일제시대 임전대책협의회 활동)

제3부수상: 김책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 (일제시대 광산 지배인, 1977년 정무원 부총리)

민족보위상: 최용건

국가검열위원장: 김원봉

외무상: 박헌영 (겸임)

내무상: 박일우

산업상: 김책 (겸임)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이승엽

노동상: 허성택

보건상: 이병남

문화선전상: 허정숙

도시건설상: 이용

무임소상: 이극로

 

▲ 기타 북한(북조선) 역대 고위직 친일 명단

 

* 김영주: 부주석 (김일성 동생, 일제시대 헌병 보조원)

* 장헌근: 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

* 정국은: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기자)

* 김정제: 보위성 부상 (일제시대 양주군수)

*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 홍명희: 부수상 (일제시대 임전대책협의회 활동)

* 이 활: 인민군 공군사령관 (일제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

* 허민국: 인민군 9사단장 (일제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

* 강치우: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

* 김달삼: 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시대 소위)

* 박팔양: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및 편집부장 (일제시대 만선일보 편집부장)

* 한낙규: 김일성대 교수 (일제시대 만주 검사장)

* 이승엽: 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월북 후 빨치산 유격투쟁 지도

(일제시대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Facebook  Twitter
시대정신 2017년 3/4월호(통권 77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시대정신 2017년 1/2월호(통권 7..
시대정신 2016년 11/12월호(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