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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명치유신의 고향 하기(萩)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쥬쿠(松下村塾)


[권태명]
역사에 전기가 된 현장 앞에 서면 언제나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5년간 계속된 미국 남북전쟁의 종전협정이 체결된 버지니아주 아포매톡스(Appomattox) 마을 맥클린 하우스(McLean House)의 비좁은 방이나 명치유신을 배태시킨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벽촌 하기(萩)마을의 초라한 다다미 방 강의실 쇼카손쥬쿠(松下村塾)가 바로 그런 곳이다.

일본 본주本州 맨 남단 야마구치현의 하기(萩)는 한 쪽이 바다이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항구이다. 하기는 1604년 이 지역의 대영주였던 모오리 데루모토(毛利輝本)가 바다에 면한 지월산指月山 자락에 거성居城을 축성하고 13대를 이은 260년간 영화를 누렸던 곳이다. 하기성은 명치 7년에 해체되었으며 지금은 돌담과 성을 둘러쌌던 해자만 일부 남아있어 하기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기시 전경
모오리 데루모토가 하기를 거성으로 삼은 것은 이곳을 외부침략에 대한 방어에 최적지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서쪽으로 하시모토(橋本)강이, 그리고 동에는 마쓰모토(松本)강이 휘감아 흐르고 그 뒤로 험산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싼 지형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동해 쪽에 면해있는 야마구치현은 주민 150만 정도에 남부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해변에 형성된 중화학 콤비나트와 자동차 공장 등 일부 제조업을 제외하면 농업과 어업이 주요 산업이며 경제자립도가 낮은 주에 속한다. 특히 하기(萩)는 관광이 주산업으로 농업과 어업 그리고 도자기산업이 소득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7세기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 때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에 참여했다 패전한 야마토정은 지금의 하기에 방어용으로 ‘조선식 산성山城’을 축성했다. 또한 조슈현(長州縣, 현 야마구치현)은 1905년부터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의 운항을 시작, 우리나라와 최초로 해상교통로를 열기도 했다.

전국시대에 나가도(長門)국의 하기번(萩藩)으로 세력을 떨쳤던 하기는 현재 우리나라의 울산광역시와 전남 영암군 덕진면과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 ‘하기(萩)’라는 지명은 동백나무의 일본어인 ‘쓰바키(つばき)’의 ‘바키(ばき)’에서 전와傳訛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기시 앞 바다는 남쪽의 나가도(長門)와 북쪽의 다카야마 미사키(高山岬)를 이은 60여 킬로미터 지역이 기타나가도(北長門) 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하기로 이어지는 교통시설은 완행철도선 하나 밖에 없고 버스노선이 몇 가닥 있으나 교통사정이 불편한 곳이다.벽촌인 하기를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이곳이 명치유신의 사상적 발원지이자 유신을 전후한 격동기에 유신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치유신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쇼카손쥬쿠

하기출신으로 명치유신의 등심燈心에 점화한 선각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약관에 하기의 청소년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쳤다. 백 명 가까운 그의 문하생들은 훗날 명치유신을 주도하거나 유신정부를 이끌며 현대일본 건설에 큰 족적을 남겼다. 야마구치현 출신 8명의 총리 중 3명이 이 작은 마을에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尹),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그리고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이 쇼인의 수제자들이다.

조슈번의 하급무사였던 스기 유리노스케(杉百合之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쇼인은 6세 때부터 숙부에게 신학문과 병학을 배웠으며 11세의 어린 나이에 번주藩主 앞에서 병서인 무교전서武敎全書를 강의할 정도로 신동이었다. 어릴 때부터 해외정세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쇼인은 19세 때 번藩의 학교인 명륜관明倫館에서 병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명치유신 3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기도 다카요시는 이때 쇼인에게 배웠다.

쇼인은 25세에 서구문화의 습득을 목적으로 미국 밀항계획을 세우고 당시 일본을 찾은 페리의 흑선黑船에 잠입했으나 강제 하선 당했으며, 이 사건이 국법위반죄에 해당되어 에도의 덴마초(傳馬町)감옥에 투옥되었다가 6개월 뒤 하기형무소로 옮겨져 다시 1년을 더 살았다. 쇼인은 감옥에서도 11명의 수감자들을 모아 하이쿠(俳句)나 문학 등 각기 전문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교환토록 하는 연구회를 결성, 옥중교육을 지도했는데 이 가운데는 뒷날 쇼인의 쇼카손쥬쿠에서 하이쿠와 서도를 가르친 교사도 나왔다고 하기박물관의 오오다니(大谷)학예관이 전했다.

쇼인은 하기형무소 수감생활 중 철학, 역사, 지리, 병학, 의학 분야의 서적을 6백여 권이나 독파했다. 형무소에서 출옥했으나 다시 가택연금으로 이어졌다. 쇼인은 이때 다다미 3장 반짜리의 좁은 유수실幽囚室에 학생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이듬해인 1856년, 숙부가 운영하던 사설학원인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이어받아 본격적인 청소년교육에 나섰다. 

당시 조슈번의 무사였던 쇼인의 숙부는 어린 조카인 쇼인을 스파르타식 방법에 따라 교육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쇼인의 쇼카손주쿠는 그가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주도한 죄로 30세 때인 1859년 에도(江戶)의 덴마쵸(伝馬町) 감옥에서 처형된 후에도 계속되다가 명치중엽인 1892년 폐쇄되고 말았다.

요시다 쇼인생가 터의 쇼인 동상

막부타도의 주동자로 쇼인의 수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는 자신이 창설한 기병대를 이끌고 막부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나 명치유신을 목전에 둔 29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으며, 막부타도와 존왕양이 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동지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도 외국공사관을 불태우고 시모노세키(下關)해협을 통과하는 구미선박을 포격하는 등 적극적인 양이작전을 펼쳤으나 1864년 교토에서 벌어진 막부군과의 전투(禁門의變)에서 패배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25세에 자결하고 말았다.

식견과 기백이 탁월하고 재기가 넘치는 인재라며 신사쿠와 겐즈이를 특별히 아꼈던 스승 쇼인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언제나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이토 히로부비(伊藤博文)는 다카스기 신사쿠를 기리며 그의 묘비에 “움직일 때는 번개 같고 일어날 때는 비바람 같다” 는 찬사의 비문을 남기고 있다.  

20대 초반에 이미 수많은 전문서적을 접해 깊은 지식과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예견했던 쇼인은 제자들에게 순수이론보다는 특히 시사문제에 역점을 둔 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무사와 평민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가르쳤다.

견문을 넓히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청취를 위해 21세 때부터 5년 동안 1만 3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여행한 쇼인은 나라가 필요로 할 때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있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바로 지사志士라고 강조하면서 도막倒幕 운동에 앞장 것을 늘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가 쓴 쇼카손쥬쿠기(松下村塾記)에 이러한 그의 교육철학이 잘 나타나있다. 쇼인은 강의에 특정교재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강의시간도 규칙이나 사소한 예의에 구애됨이 없이 학생들이 모이면 그때부터 시작했다.

쇼인의 강의는 언제나 열정이 넘쳐 있었다. 충신이나 열사, 의사 등 애국지사에 대해 강의 할 때는 눈물을 흘렸고 역적에 관해 논할 때는 비분강개하기도 해 학생들도 그를 따라 울고 분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쇼인에게 배운 학생은 2명의 아홉 살짜리 어린이를 포함해 대부분이 10대와 20대의 청소년들이었으며 하루 평균 20~30여 명의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 존왕양이尊王洋夷를 외치며 개국을 반대하다 투옥되어 30세 때인 1859년 사형에 처해질 때까지 2년 10개월간 쇼카손쥬쿠가 배출한 쇼인의 문하생은 모두 92명에 이르며 이들은 후 날 정치, 사상, 교육, 의료, 기업,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현대일본 건설에 동량이 되었다. 

쇼인이 교사로 있었던 명륜관에서 가르침을 받은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훗날 사쓰마(薩摩)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함께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이른바 ‘명치유신 3걸’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쇼인을 친형처럼 받들었던 기도 다카요시는 쇼인 사후 쇼카손쥬쿠 출신 지사들의 좌장역할을 맡아 도막운동을 이어갔다.

다카스기 신사쿠 생가

5년 만에 다시 찾은 하기는 그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듯 했다. 인천공항을 아침 8시에 출발한 비행기가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 공항에 닿은 게 9시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이었으나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야 했기 때문에 하기에는 1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후쿠오카의 하카다(博多)역에서 신야마구치(新山口)역까지는 신칸센(新幹線)으로 3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으나 거기서 하기까지가 좁은 산길이어서 55킬로미터의 거리를 완행버스로 한 시간 반이나 소요되었다. 당일 나라(奈良)까지 들러야 하는 1박2일의 짧은 일정이라 시간이 빠듯했다.

우선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쥬쿠를 찾았다. 집 옆에 ‘史蹟松下村塾’ 이라고 새겨진 2미터 높이의 화강암 표지석이 서있고 검게 변색된 목조에 기와를 올린 수수한 단층 평가는 쇼인신사 경내에 있었다. ‘松下村塾’은 지역이름인 ‘松本村’에서 따 온 것이다.

이름의 근거에 대해 쇼인의 『松下村塾記』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학문의 목적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데 있다. 塾에 ‘松本村’의 이름을 사용코자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주군에게 충성함으로써 사람들의 신의를 얻는다면 마을 이름을 숙의 이름으로 사용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을 양성한다는 그의 교육이념이기도 하다.    

쇼인이 학생을 가르친 다다미 8장짜리 강의실은 작고 소박했다.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명치유신의 산실 치고는 참으로 초라하다 싶었다. 강의가 거듭되면서 학생 수가 늘어나자 옆으로 다다미 10장 반 크기의 방을 늘려 붙였다. 십여 명의 일본인들이 묵념하듯 한참을 말 없이 방 안을 살피고 있었다.           

거기서 50여 미터 거리에 쇼인이 소년시절 살았던 스기가(杉家)의 기와집이 있고 노송이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집 옆에 세워진 현 헤이세이(平成) 천황 부처의 방문기념비와 명치유신태동지明治維新胎動地라는 자연석 비석 가까이에 쇼인신사(松陰神社)와 신사 경내에 그의 유묵遺墨전시관이, 그리고 신사 바로 옆에 쇼인역사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쇼카손쥬쿠의 강의실은 정면 들보에 ‘講義室’이라고 쓴 판자를 붙여 놓았으며 안쪽 벽에 쇼인의 족자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 옆에 그의 대리석 좌상이 놓여있다. 증축한 방 벽에는 쇼인을 중심으로 기도 타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기 신사쿠,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명치유신 운동과 유신 정부에 공적을 남긴 13명의 문하생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1854년 미국측 요구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 도쿠가와 막부는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1860년 막부와 조정이 연합한다는 내용의 공무합체론公武合體論)이 막부로부터 제시됐지만 조정이 수용하지 않았으며, 결국 1867년 정권을 조정에 완전히 반납한다는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대정봉환(大政奉還)’ 발표로 264년간 이어지던 막부의 문이 내려졌다.

명치유신태동지

일본의 정치개혁 바람은 일찍이 17세기 후반부터 불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일기 시작한 농민반란은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졌다. 이즈음부터 상품경제활동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농촌공동체가 사회개혁에 참여 할 에너지를 확보함으로써 막부체제를 대신할 서민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막부 264년 동안 일어난 농민반란은 무려 3천여 회가 넘었다.

특히 18세기 초부터 농민이 납부하는 연공年貢의 감소로 막부재정이 악화되면서 무사들이 빈궁해진 데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부유 상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무사들이 상인들로부터 차입하는 자금규모가 급격하게 증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막부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막부는 18세기 말까지 권위회복을 위해 상인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등 재정 재건정책을 강화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19세기 들어 구미열강의 개방 압력까지 가중되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게 되었다.

막부 말기에 이르러 안으로는 막부 지지세력인 좌막파佐幕派와 천황중심체제를 주장하는 존왕파尊王派가,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구미열강을 배척하는 양이론파攘夷論派와 개방을 지지하는 개국론파開國論派 간에 벌어진 논쟁은 결국 존왕개국론으로 의견이 모아져 1867년의 대정봉환大政奉還결정으로 권력이 천황에게 귀속되는 명치유신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명치유신의 다른 하나의 먼 역사적 배경을 도쿠가와막부 탄생의 분수령이 된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찾는 설도 있다. 명치유신의 주도세력은 모두 죠수(長州), 사쓰마(薩摩), 도사(土佐)번 출신으로 이들은 모두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 진영에 속해 도쿠가와에 대항했던 영주들이다.

전쟁에 패한 이들 세 번의 영주들은 영지를 몰수당하거나 축소 처분을 받아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도쿠가와 막부의 계속된 차별대우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설이다. 도사번의 영주인 조소가베(長宗我部)는 영지가 몰수되어 완전히 몰락했고, 조슈번의 모오리가(毛利家)도 영지가 4분의 1로 대폭 축소되는 처분을 받았다. 다만 사쓰마 번주인 시마쓰가(島津家)만은 영지 축소는 면했으나 막부의 감시망에 갇혀 정치적 연금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조슈번 영주인 모오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때 도쿠가와와 같은 반열인 다이로(大老)에 속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로서는 감시를 가장 철저하게 해야 할 위험인물이었다.

명치유신 3걸로 꼽히는 기도 다카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그리고 오쿠보 도치미치(大久保利通)는 각각 조슈(長州), 사쓰마(薩摩)번 출신이며 막부타도의 주도권을 놓고 대결상태에 있던 조슈, 사쓰마번을 하나로 묶어 명치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사카모도 료마(坂本龍馬)는 도사번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번의 하급무사가문 출신들이다.

명치유신을 야마토(大和) 조정시대인 7세기의 ‘대화개신(大化改新)’에서 그 원류를 찾는 설도 있다. 천황친정체제를 채택한 성격면에서 두 개신은 완전하게 일치한다. 7세기에 단행된 대화개신은 호족의 세습제와 사지사민私地私民 제도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정치체제를 변환시킨 조치이다. 또한 이때에 처음으로 ‘일본’이란 국호와 천황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소년 때 살던 집

쇼인의 문하생 중 초기의 어려운 여건을 딛고 후 날 가장 크게 활약한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이다. 하기에 있는 그의 소년시절의 집은 30평 정도의 단층 초가로 이토가 14세부터 28세 때까지 14년간 살았던 곳이다. 현재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집은 작은 방 몇 개에 화장실과 욕실은 집 밖에 있는 초라한 집이다.

이 초가는 본래 하급무사였던 이토 나오우에몬(伊藤直右衛門)이란 사람의 집이었다. 벌목 군과 잡부 등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던 이토의 아버지는 이토가 9세 때 가족을 이끌고 이토 나오우에몬의 이 집에 일꾼으로 들어갔다. 이토는 1841년 9월 2일 조슈현 구마게(熊毛) 마을에서 빈농인 하야시 쥬죠(林十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실하게 일한 것을 좋게 본 주인이 쥬죠를 양자로 삼으면서 가족이 함께 이토의 성을 얻게 되었다. 이때 이토의 나이가 14세로 가족이 모두 양자신분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토의 출세 길이 이때부터 열리기 시작했다는 게 이또 집 관리인의 설명이었다.

이토는 17세 때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쥬쿠에 입학했으며 23세 때인 1863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후 그의 출세는 초고속으로 이어졌다. 45세에 초대 총리, 52세에 2차 총리, 58세에 3차 총리, 60세에 4차 총리, 그리고 65세 때인 1905년 초대조선통감을 지냈다. 그리고 69세 때인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이토는 어릴 때 약질이었으나 영악스러워 골목대장 노릇을 했으며 또래끼리의 놀이에서도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상대방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해서라도 이기고 마는 악착스런 근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서구문화 접촉은 16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1543년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포르트갈 상인이 휴대한 총을 견본으로 제작한 철포를 시작으로 네덜란드로부터 의학, 천문, 기술, 수학, 병학 등 선진 학문을 수용하는 한편 대외무역을 확대했으며, 19세기 중엽에는 구미열강과 화친조약을 체결하는 등 일찍이 개방의 길을 택했다.

명치유신 후 일본은 빠른 속도로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었다. 대정봉환이 이루어진 후 국가권력이 천황에게 귀속된 후에도 ‘유신’ 이란 용어 대신 한 동안 ‘왕정어일신王政御一新’이란 말이 사용되었다. ‘명치유신’이란 말은 명치즉위 3년 후인 1870년에 발표된 천황의 ‘대교선포조서大敎宣布詔書’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이는 새 천황의 연호年號인 ‘명치’와 낡은 제도를 완전히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의 ‘유신’을 묶어 만들어진 것이다.

명치유신의 시기에 대해서도 논쟁이 많다. 페리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나타난 1853년에서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이 종결된 1877년까지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다른 설도 제시되고 있다. 명치 즉위해인 1867년에서 일본 국토를 현재의 행정단위로 결정한 폐번치현廢藩置県이 실시된 해인 1871년까지로 보는 설과 이밖에 명치 6년 설, 10년 설, 22년 설 등이 대표적인 주장들이다.

하기박물관

하기에는 남쪽을 막고 있는 낮은 산자락에 요시다 쇼인의 생가 터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와 명치 정부에서 총리를 두 번 지낸 가쓰라 다로(桂太郞) 등 명치유신 중심 인물들의 생가가 잘 보존되고 있다. 260년간 영화를 누렸던 모오리가의 하기성은 명치 7년에 해체되었으며 지금은 돌담과 바깥 해자의 일부만 남아있다.

하기에는 역사적인 유적과 옛 상가, 무시가옥 그리고 거리 등 수백 년을 이어 온 유적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에도야(江戶屋) 거리, 이세야(伊勢屋) 거리, 그리고 기쿠야(菊屋) 거리에는 지금도 무사들의 옛 저택과 이름난 하기도자기의 판매 가게가 줄지어 있고, 번藩에 물자를 조달했던 거상 기쿠야가(菊屋家)의 저택은 에도(江戶)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지금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기쿠야가 주변의 골목길은 ‘일본의 길 100선’에 선정되어 있다.

사백여 년을 이어 온 하기도자기의 창시자는 임진왜란 때 모오리가의 장수에게 잡혀간 조선도공 ‘고오라이자에몬(高麗左衛門)’이다. 그는 아리타야키(有田燒)의 이삼평李三平과 사쓰마야키(薩摩燒)의 심수관, 박평의朴平義, 그리고 다카도리야키(高取燒)의 다카도리 하치조(高取八藏) 등의 조선인 도공들과 같은 시기에 일본으로 잡혀갔다.

관광과 어업과 도자기 그리고 소규모의 수산물 가공공장 외에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없는 하기는 활력이 떨어져 젊은이들이 대부분 대도시로 떠나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상들 덕분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다소나마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택시기사가 일러주었다. 오늘의 일본을 만든 ‘유신의 고향’도 역사의 흐름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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